인생을 공부하는 법

子曰 苗而不秀者도 有矣夫이며 秀而不實者도 有矣夫인저.
(공자가 말하기를 "싹이 나고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것도 있 고, 꽃은 피었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도 있다.)

이 사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살고 있지만 그 사람들의 부류 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즉 계획을 세우다가도 작심삼일 이 되는 사람도 있고 노력을 무한정 해도 방법에 있어서 잘못되 어 실패하는 경우도 있는 것같다. 작심삼일 하는 사람은 소의 성 품을 배워야 할 것이다. 옛말에 牛는 丑에 해당되며 丑은 또 道 라고 일컬어오는 말을 들은적 있다. 즉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 은 인내심인 것 같다.

인생은 자연과 같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길을 걷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어린 애기일 때는 봄에 해당하고 여름은 한창 자라서 많은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이며 가을은 어른이 되어 삶의 결실을 맺는 단계이며 겨울은 인생의 종착역에 접어들어 생을 마감하게 되는 단계이기도 하다. 따라서 인생이란 길을 걷게 될 때에는 반드시 좋은 일만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슬픈 일만 생기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어려울 때에는 자신의 부족함을 한하고 봄 가을과 같은 때를 생각해서 그때에 더 큰 진폭을 만들기 위해 서 두르거나 조바심 낼 필요없이 차근차근히 다지는 것이 중요할 것 이다. 잘될 때에는 또 어려운 때를 생각해서 삼가 조심하는 마 음이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옛부터 일본사람은 "예가 없으면 망 한다"라고 했고 우리나라 사람은 '까불면 망한다"라는 말이 좋은 예인 것 같다.

인생에 있어서 왕도는 없다고 한다. 결실을 이루는데에 중요한 것은 뚜렷한 주관과 마음의 중심이 필요한 것 같다. 자신이 주관 이 없으면 전임자의 여러 방법을 모색하다보니 오히려 하나의 방 법을 발전 계승하는 것보다 시간의 낭비가 더 많아지는 것이 허 다하다. 고등학교 3학년이 대입을 칠 때처럼 시간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하나를 하더라도 또박 또박 짚고 가는 공부가 아니고 일 단 외우고 보자는 식, 모르면 답부터 보자는 성급한 마음이 이루 어 낸 결과는 다 보고 난 뒤에 새로 또 봐야 한다는 어리석음을 만들어 내어 조급한 마음이 본 대목도 재대로 보지 못하고 또 건성으로 넘어가므로 실패하는 경우가 많은 것 처럼 이러한 현상이 자신의 주관이 뚜렷하지 못한데서 오는 결과인 것 같다.

그리고 자신이 어떤 일에 임하는 자세가 두려워 하거나 배짱이 없는 마음이면 결실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식물도 음지에 서 큰 경우에는 열매가 있어도 씨가 없다고 한다. 반드시 양지에서 큰 나무라야 씨가 생긴다고 한다. 봄에 씨를 뿌리는 것은 가을에 씨를 얻고자 함인데 씨를 얻지 못하면 결실을 얻지 못하게 된 다. 자신이 걸어가야만 하는 인생의 행로에 바른 주관과 다가오 는 시련을 기꺼이 소화하고자 하는 마음이면 누구든지 좋은 결과 를 얻을 수가 있을 것 같다."

 

깨달음 - 그 흔해빠진 혼란스러움과 그에 따른 느낌들에 관하여

 깨달음, 이 단어만 나오면 부르르르 떨며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환자들이  있다. 그들은 다름아닌 '수행자병' 환자들이다. 깨달음을 일생의, 아니 앞으로 수백 수천 생이 걸리더라도 이루어내야만 할 대목표로 삼고 나아가겠다는 것까지는 좋다. 그리고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도 없다.

하지만, 이리저리 따지면서 방법론을 따지면서 병이 발동한다. '어느 교파의 어느 수행법을 따라야 할까?' 위빠사나, TM, 단전호흡, 화두선 기타등등.....

수행자들에게는 수행 과정 자체를 통해 자동적으로 제거되어지는 신념들이  있는데, 그 신념들은 수행을 하지않고, 이리저리 재기만 해서는 제거되기  어렵다. 신념들은 판단에서 비롯되어 힘을 얻는데, 방법론을 따지고 드는 것은 판단작용을 가속화시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요구된다."와 같은 깨달음과 수행과정에 대한 일정한 형태의 신념이 바로 그것이다.
 
 깨달음이란 말을 들을 때 어떤 느낌이 일어날까?  아주 대단하고, 찬란하고, 특별한 소수의 사람들에게 있는 특별한 의식상태라는 느낌이 들면 약간의 신념을 갖고 있다고 보아도 좋다. 여기에 덧붙여 '나는 깨닫지 못했다.'라는 신념이 따라 일어나면 내가 차별심을 '일으킨' 것이다. 일어난 게 아니라, '일으킨' 것이다.

라즈니쉬는 통렬하게 깨달음에 대한 대중의식을 비웃었다.  그의 깨달음에 대해 독일의 선불교 학자 두 명이 논쟁을 벌였는데, 그 내용은 대충 이러한 것이다. "라즈니쉬의 깨달음은 견성과 다르다."  "아니다. 라즈니쉬의 깨달음은 견성과 같다."

이에 라즈니쉬는 "그들은 바보 멍충이에 불과하다. 내가 왜 깨달아야하는가? 나는 나다. 도대체 내가 왜 깨달음을 얻어야만 하는가? 나는 나로서 이미 완전한 존재다."

깨달음에 관한 상상력, 신념들을 한번 돌아보자. 선불교에서 말하는 몽중일여, 숙면일여, 구경각을 심각찬란하게 받아들이면 어려워진다. 무엇이든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그것은 분별심을 일으켜 자기자신의 가능성을 막는 장애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깨달아야만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깨닫지 못한 사람도 없고,
깨달은 사람도 없다.
온통 깨달음 뿐이기 때문에 따로이 구별할 수가 없다.

- KIDS croce(이상제)님의 글중에서